본문 바로가기

예전자료/火나는 뉴스

손에 쥔 ‘화염병’은 ‘희망’이자 ‘절규’

손에 쥔 ‘화염병’은 ‘희망’이자 ‘절규’ [안병주/경기민언련 활동가]
2009년 01월 28일 (수) 11:52:04 안병주/경기민언련 활동가 mediaus@mediaus.co.kr

얼 마나 외로웠을까, 그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이 생각만 하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나이 칠십에 화염병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야만 했던 그 쓰라린 현실을 외면한 이 세상이 두렵습니다. 살인진압의 책임에 대해 ‘정당한 법집행’ 운운하는 도저히 인간의 언어로 해석할 수 없는 그 잔인함에 인간이길 포기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 26일 설을 맞아 용산 참사현장에 마련된 합동분향소 고인들의 영정 앞에서 차례음식이 놓여졌다. ⓒ민중의소리  
 
이 먹먹한 가슴 한켠을 쓸어내리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허름한 연립주택 옥상에 세워진 망루. 그 위에 마스크를 쓴 철거민들. 그들 손으로 쥐고 있던 화염병. 그 모습은 용산의 모습이 아니라 4년 전 경기도 오산시 수청동 철거지역의 모습입니다.

2005년 6월 8일. 초여름 더위에 사무실에서 지쳐갈 쯤 한통의 문자가 도착합니다. ‘오산 수청동 철거민 망루 침탈 위기’. 문자를 받자마자 솔직히 내키지 않은 걸음을 오산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50일이 넘게 망루농성을 하던 오산 수청동 철거민들의 소식을 계속 접하고 있었고, 하지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이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시각. KBS, MBC의 현장중계 차량이 보이고, 이미 경찰병력으로 둘러쌓여 현장접근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기억으로는 철거민들의 과격불법시위에 대한 공권력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본보기로 경찰특공대를 투입하고 언론과 방송사까지 총동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진압은 시작됐습니다. 최루가스와 고무총으로 중무장한 경찰특공대와 그 병력을 실은 컨테이너 박스가 철거민들이 쌓아 놓은 망루로 올려졌습니다. 테러진압부대인 경찰특공대의 진압은 과격 테러분자들 진압하는 방식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습니다. 현장에 접근하지 못한 일부의 사람들은 ‘살인진압 중단하라’는 들리지도 않는 구호를 외쳐볼 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수청동 철거민들은 끌려 내려 왔습니다. 철거용역직원들의 살인에 가까운 폭력에 시달리다, 마지막 선택인 망루농성은 그렇게 경찰특공대에 의해 진압됐습니다. 이 사건을 지켜본 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괴감과 이 사회의 변하지 않는 황망함에 며칠을 앓아야 했습니다.

   
  ▲ 경찰특공대가 20일 새벽 용산구 한강로2가 한강대로변 재개발지역 4층짜리 건물에서 강제진압 작전을 하던 중 시너가 폭발해 철거민 5명이 사망했다. ⓒ민중의소리  
 
또 하나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사제총’ 사건으로 세간을 놀라게 했던 ‘수원권선4지구 철거민 투쟁’입니다. 1998년부터 최종 진압당한 1999년 6월까지 당시 학생신분이었던 저는 철거민들이 점거하고 있던 건물을 학생들과 수시로 출입하면서 철거민들의 투쟁에 함께 했었습니다. 당시 철거민들은 권선4지구 택지개발로 인해 오갈 데 없는 세입자들이었고, 이주대책, 주거권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수년째 해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 분들 역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득달같이 달려드는 철거용역반원들과의 거친 싸움, 삶의 희망마저 하루아침에 빼앗겨버린, 그 누구도 당신들의 삶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용역반원과 경찰의 침탈에 대비해 순번을 정해 불침번을 서고 있는 중, 그 야심한 새벽에 철거민 한 분이 저를 보시며 ‘이렇게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이제 곧 위험해질 것 같으니 학생들은 빠져도 된다’는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솔직히 두려웠습니다. 솔직히 무서웠습니다. 조직폭력배보다 더한 용역직원들이 무서웠고, 언제라도 연행해갈 듯이 달려드는 경찰들이 두려웠습니다. 결국 공권력이 투입되기 며칠 전 저와 학생들은 결국 농성장에서 나왔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그 순간에도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으신 분들. 며칠뒤 그 분들은 결국 ‘사제총’ 사건을 빌미로 ‘범죄집단’ 취급받으며 그렇게 끌려 내려와야 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학교를 졸업하고 수원의 사회단체에서 일하고 있던 때, 단체 행사장에서 어떤 분이 조용히 다가와 따뜻한 오뎅 한 그릇과 음료수 한 박스를 제 옆에 놓고 슬며시 사라지는 게 보였습니다. 제가 다가가 누구시냐고 묻는 순간, 아픈 기억의 한 자락 속에 숨겨둔 그 분이었습니다. 제게 ‘고맙다’고 연신 머리를 숙이셨던 권선4지구 철거민. 바로 그 분이셨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냐고 묻는 말에 근처에서 노점을 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를 보시고,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기 미안했는지 당신이 팔고 있던 오뎅 한그릇과 음료수를 놓고 가려고 했답니다. 해드릴 말이 없었습니다. 저와 그 분은 짧막한 인사만 나누고 그렇게 다시 헤어졌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요? 수년전의 철거지역 현장과 2009년 철거지역 현장은 변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철거민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한결같습니다. ‘불법’ ‘과격’ ‘생떼’ ‘보상금’…. 철거민들에게 붙이는 딱지는 이런 것들입니다. ‘용산참사 배후세력 전철연에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는 조선일보의 사설도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건설업체와 땅가진 사람들 배불리는 개발사업은 끝간데 없이 계속되고, 그 속에 살고 있던 가난한 서민들은 오늘도 쫒겨나야 합니다.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구청과 시청에 찾아가 ‘하소연’이라도 해볼라치면 ‘생떼’ 부리지 말라며 쫓겨나기 일쑤입니다.

   
  ▲ 한 철거민이 20일 경찰의 용산 재개발지역 강제진압에 맞서 격렬히 저항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손에 쥔 ‘화염병’은 마지막 남은 ‘희망’이자 세상을 향한 ‘절규’입니다. 그 ‘희망’과 ‘절규’를 듣지는 못할망정 ‘테러진압’ 하듯 그렇게 진압하는 현실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사망의 원인이 철거민들의 화염병이라며, 농성시작 3시간만에 경찰특공대를 배치하고 투입하는 참으로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법집행’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이고 이것이 ‘법치주의’라고 하면 이런 민주주의, 이런 법치주의는 버려야 합니다. 저들이 말하는 위선에 찬 ‘경제살리기’에 철거민들은 ‘희생양’일 뿐입니다. 그런 경제 이제는 필요없습니다. 저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철거민’은 ‘기억속 저편의 과거’가 아니라 가슴아픈 ‘현실’로 또 다시 다가옵니다.

다시한번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