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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갈색 언론’의 카르텔 깨기

양훈도(경기민언련 정책위원장)

 

<거리 일보>가 폐간되었다. 갈색 개와 갈색 고양이만 기르게 하고, 다른 색 개와 고양이는 모두 죽이도록 한 정부의 법을 비판한 죄다. <거리 일보>는 갈색 개와 갈색 고양이가 ‘그 도시’에 가장 적합한 개와 개양이 종류라는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제 ‘그 도시’에는 <갈색 신문>만 남게 되었다.

 

프랑크 파블로프의 우화 『갈색 아침』에서 언론 통제는 이렇게 진행된다. 그 다음은 보지 않아도 알만하다. 70년대와 80년대 한국 사회에서 살아봤으니까. ‘그 도시’의 군인들은 <갈색 사전> <갈색 자본론> <나의 갈색투쟁> <갈색 삼총사> 따위 갈색이 들어간 책은 남기고, <황금 양털> <빨간 모자> <파랑새> <검은 고양이>를 펴낸 출판사는 줄줄이 재판에 회부한다. (레오니크 시멜코프가 그림을 그림 이 우화 그림책은 해바라기 프로젝트가 옮겨 ‘휴먼어린이’에서 얼마 전 한글 번역본을 출간했다.)

 

잠깐, 앞 단락의 잘못 된 표현 하나 바로잡고 가자. 70년대와 80년대만 그러했는가? 지금은? ‘대세’들의 ‘갈색’ 외엔 모두 ‘종북’ 딱지가 붙지 않나? 지난 정권 ‘대세’는 ‘갈색’을 ‘녹색’으로 위장하기도 했다. 그들은 ‘진짜 녹색’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종북’이라 불렀다. 요즘 ‘대세’는 정의를 주장해도 ‘종북’이라 몰아붙인다. <대세 미디어>는 녹색=종북, 정의=종북, 따지는 넘=종북, 하여튼 종북…으로 도배되어 있다. 한국 언론의 자진 암흑시대. 후대 언론학자들은 이 시대를 뭐라고 부를까? 정말 궁금하다.

 

마침내 '갈색 아침'의 주인공들은 군인들에게 체포되기에 이른다. 정부의 법령에 고분고분 순응하여 기르던 검은 개, 점박이 고양이를 제 손으로 죽였건만, 예전에 갈색이 아닌 애완동물을 길렀다는 사실 자체가 범죄라나. 범죄도 중범죄다. ‘국가반역죄’. 최근에 갈색 동물로 바꾸었어도 마음까지 변한 건 아니기 때문이란다.

 

대통령을 국민들이 직선으로 선출한다고 민주공화국이 되는 건 아니다. 대통령이라 불리는 절대군주가 군림한다면, 그렇더라도 비판조차 하지 못한다면, 결코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국가기관이 선거 범죄를 저질렀다가 완전히 들통이 났는데도 ‘자유민주주의’ 운운 한다면 ‘갈색 소’도 웃을 일 아닌가?

 

데이비드 헬드의 『민주주의의 모델들』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도 ‘단일종’이 아니다. ‘보호 자유민주주의 모델’과 ‘계발 자유민주주의 모델’로 대별된다. 보호 자유민주주의 모델에서는 자유의 보호가 핵심인 반면 계발 자유민주주의 모델에서는 자유의 확장이 엑기스다. 한국의 ‘대세’들은 보호 자유민주주의 가운데서도 가장 고색창연한 보호주의 계열만을 지키고 보전해야 할 ‘갈색’이라 우긴다. 민주주의에 관한 앞선 사유들은 참여 민주주의 모델, 숙고 민주주의 모델을 넘어 계속 진화 중이건만, 한국의 ‘대세’들은 아예 쳐다도 안 본다. 대신 이렇게 외친다. ‘갈색’이 아닌 건 다 ‘종북’이다! 쓸어 없애라!

 

그나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거리 일보들’의 숨은 붙어있다는 사실이다. 용감하게 ‘갈색 독재’에 맞서는 목소리들이 그래도 울린다는 점이다. 이 목소리는 점점 커질 것이다. 그게 역사의 순리고, 진정한 민주주의다. 더 늦기 전에 이 땅에 존재하는 알록달록 모든 색을 대변하는 언론을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